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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Thinking/기타

"고객의 숨겨진 니즈 찾자" 민속학 조사 방식 인기

고객 눈동자 움직임 분석해 매장 디스플레이 변경
印度 가정집에 카메라 설치 냉장고 활용 패턴 조사도…
"고객의 숨겨진 니즈 찾자" 민속학 조사 방식 인기


김승범 산업부 기자 sbkim@chosun.com


회사원 김 모(35)씨는 휴가철을 맞아 여자 친구에게 선물할 샌들을 고르기 위해 SK텔레콤이 운영하는 오픈마켓(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제품 수가 1만 8000개가 넘어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회사 동료 박 모(32)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로 그 오픈마켓의 또 다른 기능인 채팅을 이용해서였다. 두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진 사무실에 근무하지만, 채팅을 통해 함께 제품을 검토하고 의견을 나눴다.

이 사이트는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 동시에 채팅을 할 수 있는 '채핑' 서비스를 지난 2월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시작된 지 5개월 만에 방문객의 20% 정도가 사용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SK텔레콤이 고객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회사는 2006년 말 고객 15명의 집을 직접 방문, 고객들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리고 많은 고객들이 '11번가'의 창을 띄워놓은 상태에서 다른 채팅 전용 창을 열고 채팅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11번가 홈페이지에 채팅 공간을 마련해 놓으면, 방문객들이 쇼핑과 채팅을 동시에 즐길 수 있지 않을까?' 1년여의 연구 끝에 실제로 적용했고, 예상대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다. 이 서비스의 개시 이후 방문자가 홈페이지에 머무는 시간이 평균 23% 늘었고 페이지 뷰는 62% 증가했다.

조사를 주도했던 SK텔레콤 HCI(Human Centered Innovation·인간중심혁신)팀 강석훈 팀장은 "설문 조사나 핵심 고객 몇 명을 상대로 한 인터뷰 등 기존 조사 방법으로는 이런 아이디어가 안 나왔을 것"이라며 "고객 옆에서 직접 관찰을 했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얼마 전 인도에서 출시할 냉장고 신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델리와 뭄바이 등 대도시의 30개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 1개월간 인도인들의 냉장고 활용 패턴을 관찰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에는 채식주의자들이 많아 육류 보관 기능보다는 야채 보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LG전자는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야채 칸을 크게 만든 냉장고를 제작, 올해 안으로 인도에 출시할 예정이다.


■고객 집 방문, 동행 관찰 등 신종 조사 방법

소비자 조사 방법이 진화(進化)하고 있다. 설문 조사나 5~6명의 소비자와 함께 토론하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 등 기존의 조사 방법보다 훨씬 고객 밀착적인 새로운 고객 조사 노하우가 동원되고 있다. 보다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목적이다.

고객의 집을 방문해 제품이나 서비스 사용 상황을 지켜보고, 하루 몇 시간씩 고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초등학생을 모아 게임을 시키거나, 주부들이 수다를 떠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분석하기도 한다.

이 같은 조사 방법은 인류학자들이 특정 집단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관찰하던 방식과 유사하다고 해서 흔히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민속학)' 방식이라고 불린다. 양윤재 동서리서치 연구본부 이사는 "소비자의 요구가 갈수록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숨겨져 있는 고객의 수요를 찾아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마케팅을 하기 위해 2~3년 전부터 에스노그래피 조사 방식이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 제공 LG전자 IM(Insight Marketing·인사이트 마케팅)팀, SK텔레콤 HCI팀,KT CVIC(Customer Value Innovation Center·고객가치혁신센터)팀 등 대기업의 고객 조사 전담 조직들이 이런 방법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들 조직에는 경영학·사회학·인문학·디자인·공학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일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 4월 서울 등 대도시 5개 매장에서 20여명을 상대로 '아이 트래킹(eye tracking)'이란 새로운 방식의 조사를 벌였다. 카메라를 장착한 고글(goggle) 모양의 장치를 고객이 머리에 쓰게 한 뒤 눈동자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방법.( 참조) 조사 결과 기존 매장 진열의 문제점이 발견됐다.

기존의 제품 전시는 고객이 다니는 중앙 통로에서 볼 때 벽 쪽을 향해 일자형으로 층층이 진열돼 있다. 고객들은 중앙 통로 쪽에 있는 제품은 관심 있게 훑어보지만 안쪽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LG전자는 매장의 제품 배열 방식을 기존의 일자형에서 'ㄷ 자형'으로 바꾸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매장 가운데를 비워두고 제품을 3면으로 배열한다는 것. 이렇게 하면 고객이 통로 쪽에 진열된 주요 제품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KT 역시 KT플라자(옛 전화국)를 고객 밀착형 유통 매장으로 바꾸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아이 트래킹 조사를 활용했다. 20~40대 남녀 18명이 대상이 됐다. 조사 결과, 소비자들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공간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고객들의 시선도 분산됐다. 아이 트래킹 조사가 끝난 후 인터뷰 과정에서 소비자들은 "제품이 구역별로 나눠져 있지 않아 산만하고 매장 구조가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KT는 연령대별로 제품을 배치하는 등 매장 디자인의 방향을 수정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부 KT플라자에 적용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에스노그래피 방식의 고객 조사를 처음으로 도입해 만든 제품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올 가을 출시 예정인 마스카라의 기능·성분·용기·디자인·컬러·브러시에 상반기 180명의 고객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고객의 집을 방문해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기도 하고, 쇼핑하는 고객을 따라다니며 쇼핑 패턴이나 자주 다니는 장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미국의 세계적 소비재 업체인 P&G의 경우 아예 직원이 소비자들과 며칠 동안 함께 생활하는 'Living it'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소비자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쇼핑도 같이 하면서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P&G가 2004년 멕시코에 출시한 섬유 유연제 다우니 싱글 린스는 이 조사의 결실 중 하나다. P&G 직원들이 멕시코 소비자들의 집을 방문해 관찰한 결과, 멕시코의 저소득층 소비자들은 여러 벌의 의복을 살 만한 경제력이 없어 상대적으로 세탁을 중시하고, 세탁 시 물을 불필요하게 많이 쓰는 데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세탁할 때 여러 번 헹구지 않아도 돼 물 사용량을 3분의 2까지 줄일 수 있는 섬유 유연제를 내놓은 것. 제품을 출시한 지 6개월 후 인지도가 80% 올라갔고, 재(再)구매율이 85%에 달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통적 조사 기법의 한계를 넘기 위해 개발

새로운 조사 기법들은 전통적 조사 방법이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개발됐다. 설문 조사나 그룹 인터뷰를 할 경우 남의 눈을 의식해 본인의 속 생각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흔하고, 소비자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회사들이 저마다 소비자 연구를 활발히 벌이고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기존 방식으로는 다른 회사와 차별화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에스노그래피 방식은 국내에서는 몇몇 대기업이 2~3년 전부터 도입하기 시작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경우는 우리보다 15~20년 이상 앞서 있다"고 말했다. 미국 복사기 회사 제록스(Xerox)는 이미 1984년에 사용자가 복사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관찰했다.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fMRI)'이란 뇌(腦) 영상장치를 동원해 소비자 조사를 하기도 한다. 제품이나 광고 을 보여주면서 뇌의 움직임을 살펴 소비자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독일 다임러크라이슬러는 평균 31세의 남성 12명을 대상으로 스포츠카 을 보여주고 fMRI 장치로 뇌를 촬영했다. 스포츠카 을 본 남성들은 사회적 지위나 보상과 관련 있는 뇌 영역이 눈에 띄게 활성화됐다. 이를 통해 성취욕이 있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젊은 남성이 스포츠카를 좋아한다는 결론을 얻었다.